합스부르크 가문 4부: 마르히펠트 전투의 기적

합스부르크 가문 4부: 마르히펠트 전투의 기적

“죽기 살기로 말에 기어올라”: 시조 루돌프 1세의 대역전극

작성일: 2025년 10월

지난 3부에서 우리는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가 선제후들의 기대로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유럽 최강의 실력자인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정면으로 도전받는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선제후들은 루돌프와 오타카르가 싸우다 같이 몰락하기를 바라며 아무도 돕지 않았습니다.

결국 명목뿐인 황제 루돌프 1세는 홀로 싸워야 했습니다. 대관식 후 5년이 지난 1278년빈 북동쪽 마르히펠트에서 루돌프의 빈약한 군대와 오타카르 2세의 재정이 풍족한 대규모 군대가 격돌했습니다. 모두 루돌프에게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패배 직전의 위기: 늙은 황제가 말에서 떨어지다

전쟁은 예상대로 흘러가는 듯했습니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55세의 늙은 황제 루돌프는 한심하게도 말에서 떨어지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대로라면 사람들의 예상대로 합스부르크 왕조는 시작과 동시에 무너질 뻔했습니다.

🔥 신군(神君)의 투지

왕조의 명운이 걸린 경계에 선 루돌프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기 살기로 다시 말에 기어올랐고, 싸움은 극적으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졌습니다. 후일 그의 측근들이 그에게 ‘신군(神君)’이라는 칭호를 붙였던 것은 바로 이 비범한 투지 때문일 것입니다.

기사도를 버리고 승리를 택하다: 혁명적 기습 작전

결국 루돌프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합스부르크가에서는 이를 신앙심 깊은 그에게 신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라 믿었지만, 실상은 기사도 정신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전략 덕분이었습니다.

당시의 전장은 기사 간의 양식을 지키는 일대일 결투 중심의 전투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루돌프는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50~60기의 복병을 미리 준비하고, 적이 방심한 틈을 노려 갑작스럽게 측면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것은 혁명적 병법이었을까요, 아니면 오타카르 2세의 말처럼 ‘기사답지 못한 비겁한 방법’이었을까요? 루돌프는 미의식이나 명예보다 오직 이기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허를 찔린 오타카르 2세는 전사했고, 그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루돌프를 얕보았던 선제후들은 틀림없이 초조했을 것입니다. 루돌프 1세는 이 승리로 오타카르의 영지였던 보헤미아를 손안에 넣었고, 곧이어 오스트리아 일대도 자신의 영지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를 스위스 산속에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옮기며 이후 650년간 이어질 대제국의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남은 10년의 인생을 합스부르크 왕조를 넓히고 지키는 것만을 첫째 목표로 삼았으며, 신성로마 황제의 자리를 세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루돌프 1세라는 파격적이고 투지 넘치는 시조가 없었다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알프스의 일개 영주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의 기적적인 성립 과정은 에도 막부(265년)나 로마노프 왕조(300년)와 비교해도 그 대단함을 알 수 있는, 650년 왕조 유지라는 진정한 기적을 낳았습니다.

이것으로 ‘푸른 피의 일족’ 합스부르크 가문의 드라마틱한 기원 이야기는 끝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