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가문 7부: 직함 70개의 황제 카를 5세
결혼 동맹의 최종 결과물,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직함을 가진 군주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놔두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이 유명한 모토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루돌프 1세의 투쟁으로 획득한 오스트리아라는 발판 위에서, 막시밀리안 1세가 설계한 치밀한 결혼 전략의 최종 결과물이 바로 카를 5세(Karl V, 재위 1519~1556)였습니다. 그는 유럽 역사상 유례없는, 결혼으로 빚어진 제국의 완벽한 상징입니다.
세습으로 얻은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
카를 5세가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에 상속받은 영토 목록을 보면, 그 규모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마치 거대한 유산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듯, 유럽의 핵심 지역과 전 세계의 영토를 물려받았습니다.
- 아버지 필립을 통해: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에게서 물려받은 오스트리아 공국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 그리고 할머니 마리에게서 물려받은 부르고뉴(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의 부유한 영토.
- 어머니 후아나를 통해: 외조부모인 스페인의 카톨릭 군주(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라 1세)에게서 물려받은 스페인 왕국(카스티야와 아라곤), 이탈리아의 나폴리, 시칠리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한 신대륙 식민지까지.
이 모든 영토가 단 한 사람의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그의 제국은 유럽의 중앙(오스트리아)부터 서쪽 끝(스페인, 포르투갈)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까지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붙여졌습니다.
70가지 직함: 왕 중의 왕, 카를 5세의 위용
카를 5세의 위엄은 그가 가진 직함의 수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단순히 한 국가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카를 5세는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70가지 이상의 직함을 가졌습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 나폴리 국왕, 부르고뉴 공작, 브라반트 공작, 카탈루냐 백작, 네덜란드 군주 등을 겸했습니다. 이는 그가 형식적으로나마 다섯 종교와 열두 민족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통치했음을 의미합니다.
“오스트리아 대공 겸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겸 케른텐 공작 겸 티롤 백작 겸 보헤미아 왕 겸 헝가리 왕 겸… … .”
초대 시조인 루돌프 1세의 대관식 후 250여 년 만에, 한때 시골 약소 호족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명실공히 유럽의 패자로 우뚝 섰습니다. 왕조의 첫걸음이 무급 명예직이었던 신성로마 황제 자리를 얻는 것이었음을 상기하면, 이 성취는 더욱 기적적으로 느껴집니다.
650년 왕조를 완성한 ‘최초이자 최후의 통일 제국’
카를 5세의 제국은 합스부르크가 이룬 영토적 절정이었습니다. 그는 방대한 영토와 자금력(스페인의 신대륙 은광)을 바탕으로 프랑스, 오스만 제국, 종교 개혁 세력 등 유럽 전역의 도전에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거대한 영토는 동시에 너무나 큰 짐이었습니다. 끊임없는 전쟁과 제국의 통치 부담에 지친 카를 5세는 결국 1556년, 살아있는 채로 스스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는 초유의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직함과 영토를 동생 페르디난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아들 필립 2세(스페인 합스부르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분할로 인해 제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 합스부르크로 나뉘었지만, 이는 곧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후 650년 동안 유럽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며 왕조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는 루돌프 1세의 투지와 막시밀리안 1세의 전략, 그리고 카를 5세의 위엄이라는 세 축으로 완성된, 유럽 역사상 가장 기적적이고도 독특한 성공 사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