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가문 5부: 칼 대신 결혼반지
‘행복한 오스트리아’의 황금 모토: 전략적 결혼의 시대
작성일: 2025년 10월
지난 4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루돌프 1세는 피와 투지로 오스트리아라는 중요한 영지를 확보하며 합스부르크 왕조 650년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의 합스부르크는 칼 대신 결혼반지를 선택하며 영토 확장의 방식을 우아하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전쟁을 통해 땅을 얻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했습니다. 합스부르크는 더 빠르고, 더 저렴하며, 더 안정적인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전략적 혼인 동맹입니다. 이 정책은 곧 가문의 상징이 되었고, 전 유럽에 회자되는 명언으로 남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놔두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라틴어 명언 “Bella gerant alii, tu felix Austria nube!“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국가 경영 철학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이 모토는 합스부르크의 뛰어난 외교 전략과 지속 가능한 성장 모델을 상징합니다. 15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이 가문은 유럽의 주요 왕가와 혈연을 맺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막시밀리안 1세가 있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는 단순히 황실의 일원이 아니라, 이 결혼 정책을 유럽 전역에 걸쳐 실행에 옮긴 전략의 대가였습니다. 그는 뛰어난 기사였지만, 전쟁의 불확실성보다는 정략결혼의 확실한 이득에 주목했습니다.
결정적 첫 결혼: 부유한 네덜란드를 품에 안다
막시밀리안의 첫 번째이자 운명을 결정지은 결혼은 147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신부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손꼽히던 부르고뉴 공국의 공녀 마리(Mary of Burgundy)였습니다.
💍 부르고뉴의 가치
부르고뉴 공국은 오늘날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을 포함하는 저지대 국가(Low Countries)를 핵심 영토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당시 유럽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막대한 경제력을 상징했습니다.
마리 공녀의 아버지였던 용감공 샤를이 전사하자,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 결혼을 통해 단숨에 이 막대한 부르고뉴 유산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는 합스부르크를 알프스 지역의 중소 공국에서 프랑스 왕국에 대항할 수 있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한 수였습니다.
물론 이 결혼은 평화만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부르고뉴 영토의 일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던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는 이로 인해 수백 년간 이어질 숙명적인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 결혼반지 하나로 유럽의 최고 부국 중 하나를 얻어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들과 딸을 통해 추진한 다음 혼인 동맹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전 유럽과 신대륙을 아우르는 스페인 왕관을 가져다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6부에서는 이어진 스페인 왕가와의 운명적인 ‘트리플 웨딩’과, 이로 인해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이 탄생하는 과정을 다루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